Artist’s 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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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Statement

위기-믿음-표상의 삼면화: 변증법적으로 갱신된 동시대 성상학

 

안진국 (미술비평)

 

“간단히 말해, 우리는 대상, 특히 그림에 대한 마법적이고 전근대적인 태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며,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 그 징후학을 구성해 보는 것이다.”

—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p. 56.

 

그림은 단지 색채와 형태를 지닌 물질 대상이 아니다. 어떤 힘을 내재하고 있다. W. J. T. 미첼이 말했듯, 이미지는 우상숭배, 페티시즘, 토테미즘의 전통 속에 있으며, 종종 그림이 감정·의지·의식·행위성·욕망을 가진 존재처럼 다루어져 왔다. 노현탁은 미술이 지닌 이러한 근원적 힘을 환기하고, 이를 어떻게 감각하고 조형 문법으로 구조화할 것인가를 실험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미술에 내재한 ‘근원적 힘’은 무엇인가. ‘믿음’이다. 닮음이 원형의 힘을 불러온다는 ‘믿음’. 재현이 부재를 현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은 오늘날에도 미술 내부의 어떤 층위에 남아 있다.

선사 동굴벽화를 미술의 기원으로 상정할 때, E. H.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이를 동물의 힘을 제압하려는 주술적 목적의 산물이라 추정했다. 이는 미술이 단순한 모사를 넘어 신비적·실천적 힘과 결부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고대 철학에서 예술은 ‘미메시스(μίμησις, mimesis)’로 이해되었다. 플라톤은 이 미메시스를, 감각적 사물(이데아의 모상)을 다시 모방하기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보았지만, 닮음을 통해 부재한 원형(이데아)을 상기시키는 효력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미메시스가 정동(情動, affect)을 정화하는 제의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미메시스로서 예술은 이데아의 속성이 배어 있으며, 제의적 기능 또한 품고 있었다. 이러한 특성은 중세의 종교 이미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중세의 성화(이콘, eikōn)는 그리스도·성모·성인(원형)의 닮은 형상으로 제시됨으로써 ‘현전의 효과’를 산출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성현의 권능’을 체험하게 했다. 성화는 성스러움을 중개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면서 숭배, 감응, 기적 등의 사회적 의례를 동반했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적했듯, 사진과 영화가 도래하기 이전의 회화는 제의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처럼 회화는 근원적으로 원형의 소환(현존성)과 이에 따른 주술적·숭배적 성격(제의성)을 지닌다.

노현탁은 전근대적인 회화의 힘(현존성과 제의성)을 오늘의 제도·기술·유통 체계 속에서 동시대의 예술적 장치로 재가동함으로써, 회화의 근원적 힘을 일깨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회화를 단순한 이미지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현실의 구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감각적 인터페이스로 확장하고자 한다.”(작가노트) 이러한 작가의 선언을 받치고 있는 것은 회화의 근원적 힘이다. 그는 회화의 현존성과 제의성을 동력 삼아 자신이 인식하는 외부 구조를 화면에 펼쳐놓는다.

 

오늘의 성상학

노현탁의 작업은 언제나 ‘힘’과의 대면에서 출발한다. 그 ‘힘’은 사회적 압박이기도 하고, 기복신앙적인 관습이기도 하며, 실제 작가의 몸에 가해지는 물리적 힘이기도 하다. 그는 초기 작업에 불안 심리를 신체로 재현했고(대학 시절~2007), 2006년 ⟪오르가닉 바디⟫ 전시 전후로 외부 힘의 심리 작용을 초현실적 풍경으로 전치·형상화하며 주제를 확장하였다. 2017년 ⟪말려진 상상⟫ 전시 이후에는 사회·자본·제도 등 외부 구조가 감각을 재배열하는 방식을 본격적으로 추적하며, 재난·전쟁·폭력·정치 권력 같은 거대 힘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연도별 사건‧이미지를 수집·분류·재구성하여 사건들 사이에서 발생한 틈들을 현재적 감각으로 메우며 조형화하였다. 이 시기 작가는 관념적인 힘의 표상을 넘어 저주파 EMS(전기근육자극)를 제작 과정에 직접 삽입해 ‘외부 힘–신체–이미지’의 연결 구조와 변환 과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2019년 ⟪창경(窓鏡⟫에서는 뉴스·광고·명화 등 익숙한 기표를 EMS로 유발된 떨림·왜곡으로 재편함으로써, 물리적 힘이 지각과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가시화했고, 2022년 ⟪야간사냥⟫에서는 ‘집=자산’이라는 자본주의 코드가 개인의 감각을 교란하고 불안을 증폭시키는 현실을, 녹색 페인트 바닥이 지닌 경제 논리로부터 부동산·계급의 상징체계까지 일깨울 수 있는 일상 이미지를 초현실적으로 재구성하여 드러냈다.

이번 전시 ⟪풍수백화점⟫에서 노현탁은 뒤틀리고 왜곡된 현대의 ‘믿음’을 해부한다. 정치·문화·시장·유통의 국면에서 자본화·권력화된 주술이 ‘믿음의 관습’을 작동·전유하는 양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재난·정치·대중문화의 틈에 잠복한 믿음의 광기와 그 자본화된 유통 방식, 감각의 진동을 조형화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포착되는 것은 ‘위기-믿음-표상(이미지)’의 삼각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를 결속시키는 핵심 동력은 ‘표상’이다. 표상은 회화의 근원적인 힘, 즉 ‘닮음-현존’과 제의적 속성을 품고 있다. ‘위기-믿음-표상’의 정점에 있는 ‘믿음’은 부재(이루어지지 않음)를 현존(이룸)으로 끌어오려는 숭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회화의 근원적 ‘표상’, 즉 ‘닮음-현존’ 논리와 제의성에 닿아 있다.

노현탁은 표상-믿음 구조 속에서 중세 성상학의 메커니즘을 동시대의 조건에서 재가동하여 성스러운 임재가 어떻게 세속의 표상 체계로 이행하는지를 추적한다(<풍수백화점>, <흔들리는 신체> 연작). 작가는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의 삽화를 통해 단테 『신곡(La Divina Commedia)』의 지옥을 호출하고, 그 도상을 현재의 대중상업문화 환경으로 이식함으로써 현대인의 불안을 동시대 성상학으로 번역한다. 이렇게 ‘이콘’(성상)의 자리를 대중상업문화의 ‘아이콘’이 점유하는 상황은 비대해진 소비성이 빚어낸 오늘의 지옥도와 같다(<풍수백화점>, 2024). 동시에 작가는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신체’의 관습을 갱신한다. 중세 이콘의 전시 형식(성상 진열장)을, 촬영을 위한 스튜디오나 개인 SNS의 공간과 같은 육면체 공간(그리고 배경과 분리된 사각의 공간)—촬영과 SNS 개시는 현대의 ‘보여주기’ 장치라고 할 수 있다—에 중첩함으로써 단절(개인성)과 노출(공공성)의 장(場)에 신체를 위치시킨다. 그 내부의 인물은 불안과 좌절의 몸짓으로 전시된다(<흔들리는 신체> 연작, 2024-2025). 대중상업문화의 환경과 ‘보여주기’는, 문화·사회적 외부 힘의 작용을 가시화하는데, 작가는 여기에 저주파 EMS(물리적인 힘)를 작업에 개입시킴으로써,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외부의 힘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외부 힘–신체–이미지’의 변환 회로를 작동시키는 EMS는 화면 속 신체 일부를 왜곡하거나 실재감을 상실케하고, 기록된 정보의 지시성을 암호화한다. 작가는 회화에 내재한 전통적 태도에 발 딛고, 이콘을 현시하는 제도적 장치를 차용하여, 성스러운 임재를 소비·전시 기호의 임재로 치환한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섬기며 어떤 조건에서 버티는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위기의 주술화, 믿음의 자본화

‘위기-믿음-표상’의 구조에서 이 구조를 작동하게 하는 촉매는 ‘위기’다. 위기는 불안을 증폭시키고, 종교·재난·정치·매스미디어·사주·자기 계발의 통치 언어가 된다. 노현탁은 ‘이루어지지 않음’이 남긴 공백을 메우는 허언이 믿음의 언어로 포장되는 메커니즘(<구원 받은 나방>)과, 참사와 정치라는 공적 공간에 침투한 주술적 행위(<지푸라기> 연작, <킹스메이커>)가 현실에 균열을 내는 ‘위기의 주술화 과정’을 추적하며, 희망고문을 지속시키는 클리셰의 은폐된 매개 위치(<2년만 기다리세요>, <노력의 배신>)를 드러낸다. 실제 사건의 장에서 작동하는 주술적 행위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증폭되고, 이미 진부해져 클리셰(cliché)로 고착된 ‘믿음의 언표’는 끝없는 기다림과 희망의 망각을 생성함으로써 실패의 감각을 지운다.

‘사건의 장’에서 주술은 실패(이루어지지 않음)를 뒤집는 표상 장치로 기능한다. 1992년 다미선교회가 말한 휴거가 실패한 직후, “나방이 휴거됐다”라는 발화가 실패의 공백을 메우는 기호로 승격되는 역설은, 실패를 성화적 구도로 전환하려는 맹신을 보여준다(<구원 받은 나방>, 2025). 재난 수습 현장이 중계로 공적 무대가 되자 ‘초능력 소년’과 무속인이 호출되는 풍경은, 합리적 판단이 멈춘 틈에 주술이 응급 대체물로 진입하는 사회적 증상을 노출한다(<지푸라기> 연작, 2025). 이때 EMS가 유발한 비의도적 흔들림은 현실/믿음의 균열을 시각화한다. 대선 TV토론의 손바닥 ‘王’ 표식은 제도적 공간에 침투한 주술의 징표로서 공동체 감각에 상흔을 남긴 사건으로, 작품에서 그 흔적이 믿음의 성흔(금빛)을 연상시키지만, 결국 공동체의 상흔(깊이 패임)으로 귀결되었음을 암시한다(<킹스메이커>, 2025). ‘클리셰의 장’에서 주술은 언어를 통한 통치술로 작동한다. 사주 상담에서 발화되는 “2년만 기다리세요”라는 상투어는 매년 촬영한 자기 초상의 중첩과 그 중첩이 발생시킨 판독 불가능한 시간의 흐름은 기다림의 무효성을 암시한다(<2년만 기다리세요>, 2025). 또한 자기계발 담론의 신앙문구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시시포스적 노력을 미화하며 끝없이 노력의 굴레에만 머물게 한다(<노력의 배신>, 2025). 이러한 위기의 주술화는 종교·재난·정치·매스미디어·사주·자기 계발의 장(場)에서 망상적 믿음을 생산·유통하며, 사회 내부에 상흔을 남긴다. 노현탁은 위기의 국면에서 수행되는 공허한 주술적 행위와 언어가 빚어낸 ‘틈’을 포착해 가시화한다.

이러한 노현탁 작업은 최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기성품(ready-made)의 도입과 활용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실제 존재하는 온라인 쇼핑몰(풍수백화점; www.pacher.co.kr)에서 구매한 길상물(吉祥物)을 변형하여 제시함으로써, 이콘(성화)에 대한 숭배 욕망—정확히는 성스러움의 사적 소유 욕망—이 자본에 포섭되어 복제·유통·소비의 회로에서 작동하는 현상을 드러낸다. 복제·유통·소비되는 길상물은 ‘현존’을 보증하는 ‘닮음’의 도상에서 사적 소유의 증거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작업의 전개는 크게 평면과 입체 두 범주로 분화된다.

평면 작업은 상징과 사실, 복제와 개별의 충돌을 표면화한다. 작가는 복제된 달마 인쇄물 위에 타자의 사실적 얼굴을 중첩해 신성/개인의 경계와 상징/사실의 간섭을 가시화하고(<달마도> 연작, 2025), 사무실에 걸린 성화와 액자 유리에 비친 사무실 풍경을 겹쳐 그려 성(聖)과 속(俗)의 동시 현전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신성의 위치를 질문한다(<중첩된 믿음>, 2025). 이는 이콘을 ‘신성의 제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단’에 봉헌하는 소비문화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입체 작업은 믿음–자본의 결합을 대체된 물질성으로 조형한다. 그는 연화수 길상물의 연꽃을 실제 지폐나 캐릭터 머리로 치환해 성스러운 상징(蓮花)의 변질과 자본의 개입을 노출하고(<연화수> 연작, 2025), 물고기·두꺼비 길상물의 비늘과 피부를 실제 지폐로 대체해 복·재물의 기호(물고기·두꺼비)가 자본에 포섭되는 순간을 명징하게 제시한다(<초재금룡(招财金龙)>, 2025, <초재섬서(招财蟾蜍)>, 2025). 또는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탑을 절단·재배열해 굽은 인간의 척추로 재구성함으로써, “신앙의 수직 구조가 어떻게 인간의 감각과 불안을 형성하는가”(작가노트)를 형상으로 묻는다.(<문창골탑(文昌骨塔)>, 2025).

그의 작업에서 ‘신성–상품–소비’로 작동하는 동시대 물신성은 유통 경로·물질 질감·신체 감각의 층위에서 드러난다. 작업은 신성–상품–소비 구조를 지닌 ‘믿음의 자본화’를 비판적 감각으로 가시화한다.

 

메타 오토마티즘과 갱신된 성상학

노현탁의 표현 양식에서 핵심은 EMS를 매개로 한 ‘메타 오토마티즘(Meta-Automatism)’이다. 작가가 만든 이 개념은 외부의 구조, 즉 외부의 힘에 반응하는 몸을 회화의 매개로 삼는 실천이다. 여기서 외부 구조는 자본·제도·관습 같은 비물질적 힘까지 포괄한다. 다만 직접적인 실천의 차원에서는 EMS의 물리적 개입이 이 개념과 가장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노현탁은 의식적으로 설계한 형상 위에 EMS가 만들어내는 비의도적 떨림을 병치함으로써, 화면에 두 개의 시간—계획의 시간과 자극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도록 배치한다. 두 시간의 시차는 감각이 어긋나고 해석이 멈추며 의미를 불완전하게 하는 ‘틈’, 바로 이격(離隔)을 만들어내는데, 이 이격을 통해 작가는 현재의 아이러니를 부상시킨다.

물리적 외부 구조로서 EMS는 이번 전시에서 세 방향으로 기능한다. 첫째, 증거로서의 기능. 비가시적인 외부의 힘(종교·재난·정치·매스미디어·사주·자기계발)이 남긴 흔적을 물질적 흔들림으로 표면에 현시한다. 둘째, 저항의 기능. 완결성과 정합성을 요구하는 예술의 성상성을 흔들리는 표현으로 훼손한다. 셋째, 번역의 기능. 신화적 상상, 상품 기호, 정치적 표식 사이의 간섭을 시각 언어로 치환하여 서로 다른 체계들을 동일한 진동의 문법으로 연결한다. 요컨대 메타 오토마티즘은 진동과 간섭 속에서 세계의 균열을 포착함으로써 표현 가능 영역을 확장한다.

노현탁은 회화, 넓게는 모든 예술—미술, 음악, 문학, 춤, 연극 등 모든 예술은 어떤 것을 재현(모상)하는 것에서 시작했다—이 근원적으로 지닌 제의성을 현재 사회에 만연된 믿음(현대의 허구적 제의성)과 중첩함으로써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풍수백화점⟫은 현대의 성상(현대의 믿음 이미지)이 지닌 허구성 드러내는 성상파괴(Iconoclasm)의 서사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갱신된 성상학(Iconology)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현존성과 제의성이라는 미술의 원초적 힘을 현대의 허구적 제의성과 변증법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오늘날의 성상학을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더 이상 하늘에서 강림하지 않는다. 택배 상자에 담긴 길상물로 도착하고, 진부한 문구로 각인되며, 손바닥의 글자로 재현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공론장에 주술을 불러오고, 믿음을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욕망케 한다. 이제 믿음은 사고팔 수 있는, 언제든 ‘지금–여기’로 호출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숭배는 자신의 자리를 바꿨다. 미키마우스의 얼굴, 불안과 좌절의 신체, ‘王’ 글자, 진부한 믿음의 문구, 길상물의 가격표에 자리 잡았다. 노현탁은 작업을 통해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믿음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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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pp. 53-58.

 

2) 물론 동굴 벽화의 기능과 의미에 관해서는 집단 정체성·결속을 위한 사회적 장치, 지식 교육과 기억의 장치, 심미·놀이를 위한 감각적 장치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3)EMS는 Electrical Muscle Stimulation의 약어로, 전기 신호로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기술이다. 주로 피부에 부착형 패드 방식의 저주파 자극기에 쓰이며, 전극이 신호를 근육에 직접 전달해 자극을 발생시킨다. 작가에 따르면, 전기 신호를 다양하게 변조할 수 있어, 신호의 특성에 따른 선의 변형 양상을 연구할 수 있다.

 

4)작가는 실제 존재하는 온라인 상호 ‘풍수백화점’(www.pacher.co.rk)을 전시 제목으로 가져왔다.

 

5)‘이콘’과 ‘아이콘’은 모두 그리스어 eikōn(εἰκών)에서 유래한 용어다. 두 표현은 로마자 표기에서는 동일하게 icon이지만, 한국어 사용 맥락에서, ‘이콘’은 종교·신앙적 맥락의 성화나 상징적 도상을 지시하고, ‘아이콘’은 일상 및 디지털 환경의 시각적 기호 또는 상징적 인물을 의미한다.

 

6)구스타브 도레의 삽화에는 사람들이 금화로 가득 찬 거대한 자루들을, 안간힘을 쓰며 지탱한다. 그 그림이 삽입된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재화는 운명에 맡겨져 있건만, 인간은 그 짧은 바람 때문에 다투는구나. 달 아래 있는, 언제라도 있었던 황금을 전부 바쳐도 이 지친 영혼 중 하나라도 쉬게 할 수 있더냐.”

<풍수백화점> 작가노트

 

■ 노현탁

 

2022년 대선 TV토론 당시, 한 후보의 손바닥에 적혀 있던 글자 하나—‘王(왕)’. 그 짧은 부적 하나가 드러낸 것은 ‘믿음’의 구조였다.공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할 정치 무대에서조차 우리는 즉석 안심의 기호를 소비한다 그 장면이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었다. 조금은 당혹스럽고 그러나 지독히 익숙한 현실로부터.

전시 제목 《풍수백화점》은 실제 존재하는 온라인 상호에서 가져왔다. 풍수는 지금 그림이자 상품이며 믿음은 벽에 걸리고 쇼핑몰에 등록된다. 이 전시는 풍수를 비롯해 위기와 불안 속에서 작동하는 신념 체계들이 어떻게 기호로 변형되고 유통되며, 반복 소비되는지를 주시한다.

풍수는 본래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추구하던 동양 철학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불안을 달래는 장식이자 ‘믿음의 포장지’로 작동하는 기호가 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무속인이 구조 현장에 호출되던 장면처럼. 위기의 순간, 사람들은 해답이 아니라 신화적 이미지를 찾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어느새 ‘믿음의 알약’처럼 포장되어 유통된다. 달마도, 잉어, 두꺼비는 벽에 걸리는 동시에 마케팅 오브제가 되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자기계발 산업 속에서 신념의 상품 언어로 기능한다. 믿음은 이제 감정의 안정제이며 거래 가능한 기호다.

《풍수백화점》은 이런 시각적 신념들이 이미지, 불안, 소비의 구조 사이를 진동하는 방식을 회화 내부에서 조형의 간섭 구조로 재구성한다.

이를 위해 나는 전시장 주변의 카페, 약국, 미용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실제로 진열된 풍수 소품을 관찰하고 교환하거나 구매하려는 시도를 했다. 기존 오브제와 나의 작업 의도를 설명하며 내가 준비한 오브제나 금액으로 교환하려 했지만 모두 정중히 거절당했다.

처음엔 단순한 협조 요청으로 시작 했는데 이런 접근 방식 자체가 다소 무례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 오브제들이 먼지가 쌓이고 액자가 떨어진 채 방치되어 있음에도 내가 관심을 보이자 사람들은 그것을 손대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듯했다.

무심하게 걸려 있던 대상이 누군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돌연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전환되는 감정의 전이를 목격한 셈이다.

이 경험은 작업의 방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믿음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기호나 장식이 아니라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거리나 감각의 잔존물과 얽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믿음은 그것이 작동하는 맥락을 벗어났을 때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직접 확보한 오브제는 없었지만, 현장에서 촬영한 이미지 기록들은 이후 작업으로 변주되었다. 실패한 시도의 잔재였지만 오히려 그만큼 믿음이 작동하는 현실의 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나는 거래 자체보다는 그러한 반응과 분위기에서 감지된 감정의 마찰, 그리고 믿음에 대한 무의식적 애착과 방어의 층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풍수백화점’이라는 실제 상호명을 제목으로 삼고 신앙 오브제를 하얀 좌대 위에 배치해 전시와 소비, 신성과 상품성의 경계를 비평적으로 교차시켰다.

유통 구조에 대한 조사는 이후 온라인 플랫폼으로 전환되었다. ‘풍수백화점’을 비롯한 여러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같은 범주의 소품들을 구매하며 믿음이 어떤 ‘시장적 경로’를 따라 도착하는지를 추적했다. 어릴 적 기억, 사회 재난과 관련된 뉴스 이미지, SNS에 떠도는 부적과 상징물 속에서 감각의 잔재와 정서의 틈도 함께 수집했다. 믿음은 단지 정보나 상징이 아니라 감각의 표면과 기억의 틈 사이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수집과 조합의 방식은 회화적 연구로 기능하며 믿음이 어떻게 현실과 상상, 감각과 정보 사이에서 기호화되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달마도, 잉어, 두꺼비 등 신앙의 상징물은 기존 형상 위에 자본/기호/캐릭터를 병치함으로써 기호와 현실 형상이 간섭하는 감각 구조를 회화 혹은 조형물 내부에서 구성한다.

이 간섭은 관객의 감각에 신앙적 이미지로 진입하게 만들었다가 해석이 어긋나는 순간을 유도하며 감각 자체의 구조가 어떻게 사회적 믿음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과정을 가능케 하는 핵심 기법은 내가 고안한 Meta-Automatism(메타 오토마티즘)이다. 계획된 설계를 바탕으로 외부 자극(EMS)을 병치시켜 의도와 비의도, 통제와 떨림이 동시에 발생하도록 유도한다. 붓질의 물성과 신체 반응의 불규칙성이 중첩되며, 회화는 하나의 ‘감정적 진동 장치’처럼 작동하게 된다. 그 결과물은 단순 재현을 넘어서 믿음의 감각적 잔향을 진동하고 잔류한다. 이 개념은 본 전시의 핵심 작업 중 하나인 〈흔들리는 신체〉 시리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과거 성인 도상이 신성한 믿음을 시각적으로 체현했던 것처럼 오늘날 SNS 상에서는 과장된 포즈와 연출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 욕망, 사회적 환상이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나는 웹에서 수집한 과장된 모델 포즈를 기호적 간섭 실험의 도구로 전환하여 작업에 사용했다. 이 사진들은 단순한 회화적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의 기준점이자 사회적 욕망이 투사된 신체 기호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수집된 이미지는 메타 오토마티즘 기법을 통해 외부 자극(EMS)이 개입된 물리적 떨림과 중첩되며 의도된 형상과 실제 붓질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날 신체가 어떻게 시각적 숭배의 대상으로 기능하고 동시에 감각적 간섭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회화 내부에서 시각화하는 시도다.

 

이 전시는 믿음이 어떻게 기호로 전환되어 시장에 진입하고 그 기호가 감각에 간섭함으로써 기억과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 구조를 어떻게 재편하는지를 탐구한다.

《풍수백화점》은 이어질 3부작의 첫 장이기도 하다. 2026년 《기억 구멍》에서는 망각을 유도하는 감정의 알고리즘을, 2027년 《마법의 주문》에서는 믿음이 신화화되는 정치적 공동체의 구조를 다룰 예정이다.

나는 거대하고 강렬한 힘과 마주친 인간의 상황이나 심리 혹은 정체성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
여기서 강렬한 힘이란 자연재해나 사고 죽음 혹은 인간에 의한 폭력 사회와 정치 권력 구조 등의 불가항력을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불가항력과 인간의 충돌을 관찰할 때 기억과 감정이 왜곡되고 변형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노현탁

I am interested in changes in human situation, psychology, or identity that have encountered enormous and intense power.
Intense power here refers to force majeure such as natural disaster, accident, death, violence by human, social and political power structures and so on.
Interestingly, when I observe force majeure and human collision, I find a point where memory and emotion are distorted and transformed


Roh Hyuntak

본 전시의 주제는 사회가 강요하는 단선적인 욕망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의 원초적인 불안 에 초점을 맞추고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조형성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나는 20대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주로 옥탑에서 거주하였다 그때부터 들었던 한 가지의 궁금증은 한국의 주차장이나 옥상 바닥이 천편일률적으로 녹색이 많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녹색은 시각적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아름다운 컬러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롤러스케이트장 바닥도 녹색의 페인트로 기억하는데 동네 불량배들 때문에 불안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녹색의 페인트 바닥은 나에게 불쾌하게 작동한다.

주차장이나 옥상 바닥에 공통으로 녹색을 많이 쓰는 이유는 우레탄 방수 페인트에 들어가는 산화크롬 이라는 물질이 짙은 녹색을 띠는데 별도의 색을 만들려면 그만큼 경비가 지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인의 미감이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형성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결혼과 신혼집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 조언이나 정보들도 놀라울 정도로 공통되었는데 그것은 집을 자산 증식을 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집 자산 증식 이라는 강박적인 메시지는 나의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인간은 다양한 관점과 욕망이 촘촘히 엮인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세계를 인식해 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자본 중심주의라는 메시지를 가장 강하게 발신한다.

개인의 관점의 단순화는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으로 작용하고 이는 불안에 대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나는 세계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인식할 수 있는 단서를 불안에서 착안하고 불안감이 작동하는 공공장소 단일한 메세지와 연관된 개인적 사건 대중매체의 이미지 등을 수집하고 재구성하였다.
예를 들어 작품 <화목동>은 화곡동에 살던 당시에 누군가가 내가 어디 사는지를 묻는다면 사는 지역을 화곡동이 아니라 목동으로 바꿔 말하라는 지인의 조언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화곡동이 속한 강서구의 상징 동물 까치 와 목동이 속한 양천구의 상징 동물 꿩 을 소재로 사는 지역 에 따른 계급지표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었다.

작품 <평화와 번영을 위한 만찬>은 2018 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지역 부동산 상승에 대한 뉴스를 모티브로 한 작업이다. 뉴스 보도를 보면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안도감보다 부동산 관련 이슈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불안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 지점이 흥미로웠다.

야간 사냥은 사냥꾼이 어둠 속에서 최종 목적인 사냥감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듯 모든 가치 기준을 자본으로 정하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고유한 욕망을 잃어버린 불안한 개인의 이야기이다.


노현탁

Artist Statement / Solo exhibition <Night Hunting> 

The theme of this exhibition is focused on the ‘primal anxiety of an individual’ formed by the unilinear desire imposed by society through exploring formativeness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I lived mostly on rooftops from my 20 s until I got married. One question I had at the time was that parking lots and rooftop floors in Korea are uniformly painted green. Moreover, the green was not a visually relaxing or a beautiful color.

The floor of the roller skating rink that I went to when I was a child was also green, and I have anxious memories of the local bullies I met there.
So even now, the green paint floor works unpleasantly to me.

The reason why green is commonly used on parking lots and rooftop floors is that a substance called chromium oxide, which is used in urethane waterproof paint, is dark green, so additional costs are spent to make a separate color. It is interesting that Koreans’ aesthetics are formed by economic efficiency.

While preparing for the wedding and the new home, the advice and information of the people around us were surprisingly similar, which is to consider the home as an object for wealth increase The obsessive message of ‘home wealth growth’ only heightened my anxiety.

I think that humans are beings who perceive a huge world through a network in which various perspectives and desires are closely intertwined. However, the current Korean society sends the message of capitalism the strongest.

The simplification of an individual’s perspective acts as an incomplete perception of the world, and it acts as a cause for anxiety. Therefore,
I perceived the clue from ‘ which is able to recognize the missing pieces of the world, and collected and reorganized the images of public places where anxiety works, personal events related to a single message and mass media.

For example, the work <HwaMok-dong>  started with the advice of an acquaintance that to answer Mok dong instead of Hwagok dong if someone asked me where I live when I was living in Hwagok dong It is an expression of the anxiety about the class index according to the ‘region where we live’ with ‘the symbolic animal’ of Gangseo gu to which Hwagok dong belongs, and a symbol of Yangcheon gu where Mok dong belongs.

The work <DinnerforPeaceandProsperity> is a work motivated by the news about the rise in local real estate related to 2018 South North Korean summit. It was interesting to find myself anxious because of the relative deprivation caused by real estate issues rather than the relief of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fter watching the news report.

The exhibition is a personal story of an anxious individual who has lost his or her unique desire in the society where all value standards are set at capital as if a hunter lost their ultimate target object in the dark.


Roh Hyuntak

사회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 불안에 관한 회화적 탐구

 

나는 자연의 힘 사회의 권력 구조 폭력과 같은 불가항력 앞에 개인이 던져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을 회화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작가에게 있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거대하고 예측불허하며 행복과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스터리한 공간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개인과 맞닥드릴 때 드러나는 개인의 제한적인 관점 개인의 무력함 그리고 개인의 예상치 못한 반응들과 그로 인해 알게 되는 개인의 제한적인 관점의 한계 등이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드러난다.

본 작업들은 이 거대한 세계의 구조와 내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이해 하고 있는지 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복잡하고 거대해진 현재 세계는 서로 영향을 받으며 시시각각 변하고 진행된다. 그런 세계를 내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란 사실 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세계와 내가 처음 접촉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연도별 사건 사고 매스미디어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한 이미지와 사건 관련 자료를 연도별로 분류해서 새롭게 재구성했다. 한 연도의 사건들을 재구성할 때 사건과 사건 사이에 틈이 생기는데 이 틈은 수집한 사건 속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현재의 나와 만나며 충돌하거나 왜곡되어 상상으로 메웠다.

예를 들면, 작품 영웅의 귀환은 1983 년 북한에서 귀순한 이웅평 대위를 모티브로 작업했다. 이 사건은 내 초등학교 시절 반공교육의 단골 메뉴로 처음 계획은 이웅평 대위와 그가 타고 온 미그 19 전투기만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자료 수집 중에 이웅평 대위의 귀순한 동기가 삼양라면 봉지에 적힌 문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라면
봉지에는 제품에 하자가 있으면 소비자에게 교환해 준다는 내용인데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사건의 시작이 단지 소비자 문구였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이웅평 대위의 전신은 저주파 자극기를 팔에 붙이고 캔버스 위에 직접 그리고 삼양라면 봉지색인 버밀리온 색을 배경 공간에 먼저 바르고 위에 전투기와 배경을 완성하여 틈 사이에 버밀리온 색이 보이도록 작업하였다. 같은 해에 할리우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6 제다이의 귀환 이 개봉되어 작품 제목으로 참고 하였다.

작업의 형식은 불안감이 작동하는 장소나 소재 이미지나 사건 사고 대중매체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미술사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변용시키며 탐구한다. 특히 15 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을 이용한 재현 방식과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 그리고 표현주의 회화의 방법론은 본인의 관심주제를 풀기위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작업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부조리한 심리나 기억이 왜곡되는 지점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주의의 기법 중 하나인 오토마티즘 에서 착안하여 저주파 자극기를 신체 일부 그림을 그리는 손과 팔에 부착하고 물리적 제한과 교란 자극을 하여 드로잉 에스키스 또는 캔버스에 직접 형상을 그린다. 다음 단계로는 자극기를 뗀 손으로 붓 터치를 더해 인물을 원상태에 가깝게 복원한다.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현대의 디지털 화면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의 대비되는 지점을 드러내고자 드로잉 에스키스 등은 디지털로 변환하여 포토샵으로 재구성할 때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을 이용한 구도를 차용하는데 이렇게 나온 작업 결과물은 회화로 재현 할 때에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자르거나 변환 중에 발생하는 거친 면들이 드러나도록 작업한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성 앞에 인간의 욕망이 개입하여 만들어지는 심리현상을 회화적조형으로 탐구하고 있다.


노 현 탁